- by Piano

- 오늘 연구소에서 강연을 하나 들으러 갔더랬다. Science DOJO라고, 일종의 튜토리얼 강의인데. 그 마지막 강의로 리켄의 기간연구소 소장이신 타마오 센세의 강연. 연구실 박사님이 가신다고 할 때는 굳이 따라갈 생각이 아니었는데, 커피 한 잔 사서 자리에 돌아와 강연 안내 메일을 보고선 훅, 꽂혀서 가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강연의 제목이 '논문 한 편보다는 100명의 친구를!' 이었던거지.. 

- 알고보니 제목은 좀 훼이크(..)라고 할까, 메인 파트가 아니었고. 메인 파트는 여태 해 오신 연구에 대한 소개. 유기합성을 하시는 분이었는데, 생각보다 굉장히 재미있어서 무척 흥미있게 들었다. 처음에는 니켈 포스핀 촉매를 이용한 크로스커플링 반응, 그리고 나중에는 실리콘, 붕소, 등의 main element chemistry. 아이디어를 전개해오신 방향도, 그 아이디어로 만들어 내신 설명들도 무척 재미있었네. 나처럼 유기에 약한 사람도 (나란 사람 석사 입시때 유기를 100점 만점에 2점인가 받은 사람-_-), 디테일은 잘 못알아들어도 컨셉은 오오! 하면서 들을 수 있는. 

- 조금 삼천포로 빠져보자면, 나는 유기를 지지리도 못했고 지지리도 싫어했지만, 나중에야 이게 얼마나 재미있는 것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살짝 알아채게 되었더랬다. 비슷한 원리로 나는 생명 쪽의 과목도 굉장히 싫어했는데, 역시 이쪽도 비슷하게 생각한다. 그러니까, 어떤 분야에 대해 알아가기 위해서는 그 분야의 '언어'를 알아야 하고, 유기나 생명은 그 '문턱'이 높은 것 뿐이다. 뭐 아직도 문턱은 넘지 못했지만, 적어도 저 사람들이 내가 아주아주 러프하게밖에 모르는 언어를 가지고 있고, 그 언어의 논리가 얼마만큼 넓어질 수 있는지, 얼마만큼의 디자인이 가능한지 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굉장히 존경스럽게 생각한다. 한편으론, 요새 엔켐을 봤을 때, 그런 전통적인 의미의 합성이나 화학, 메커니즘 등이 제대로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다, 는 느낌은 참 안타까움. 물론 내가 자세히 안 읽어서 그렇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어쨌든 그것을 포장하는 방식은 생명에서 중요한 분자, 생화학적인 방식 등인 듯 해서.. 

- 아무튼 분자들의 아이디어도 무척 재미있었고, 어떤 관점에서 '원소'들을 보고 계신가 하는 관점도 무척 재미있었다. 그리고 후반부는, 왜 제목이 '논문 한 편보다는 100명의 친구를' 인가에 대한 이야기, 연구의 자세에 대한 부분들, 연구자로서 살기 위해서 필요한 '연구 이외의' 부분들. 그런 부분도 무척 인상깊었는데.. 많이 배웠다는 생각이 들고... 

- 노요리 센세도 늘 말씀하셨더랬지만. 다른 사람이 한 것을 따라 가는 것이 아니라, '네 것', 너만의 것을 해라 라는 이야기. 뭐랄까, 얼핏 들어서는 자기계발서에 나올 것 같은 이야기이지만, 요새 꽤 그 말이 마음에 푹푹 와서 꽂힌다. 아직 '박사'라는 타이틀에 맞을 만한 깊이를 가지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일년 반밖에 남지 않은 관계로다가 ..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을 해야 할까, 나는 어떻게 될까 그런 고민들을 하다 보면 좀 그렇다. 내가 천착하는 컨셉, 은 무엇인지. 내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 그리고 

難しいことをやさしく、
やさしいことを深く、
深いことを面白く、
面白いことを真面目に書く。

이 말씀도 굉장히 와닿아서 메모해두었는데,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노우에 히사시 라는 극작가가 2008년의 무슨 시상식에서 하신 말씀이라는데 
(찾아보니 NHK의 무슨 문화 관련 상이었다.. )

연구를 하는 사람일수록, 특히 이공계쪽일 수록 자신이 무슨 연구를 하고 있는지 설명하는 게 쉽지 않으니까. 갈수록 이해하는 데에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한 일들을 하게 되니, 부모님께 내가 무슨 연구를 하고 있는지 설명을 해야 한다든지 하는 것은 .. 나는 심지어 어 같은 필드의 연구자에게도 내 토픽을 설명할 때 어디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에 대해 헤매는데. .. 
뭐 말씀의 요지는 아마 프로포절 이야기이셨던 것 같지만, 어쨌든 연구자에게 필요한 자질이고 나도 꼭 가지고 싶은 자질이라서, 좀 기억해두기로 했다. 어쨌든 나는, '깊이를' 가지고 쉽게 쓰는 사람은 아니니까.. 뭐 애초에 깊이 따위가 있어야 깊이 있게 쓰지..;

- 굉장히 좋은 말씀 많이 해 주셨는데, 슬라이드를 사진 찍어서 보관해놓고 싶을 정도로 도움 될 얘기가 많았는데 뭔가 메모를 하려 치면 일본어를 듣는 데에 애로사항이 꽃피어 (..) 별로 메모를 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역시 아직 일본어로 얘기를 듣는 건 만만치 않네. 지금이라면 그래도 좀 괜찮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으나 그렇지 않다. 역시 언어는 공부를 해야 늘지.. OTL 단어가 문제다.. 

어떤 얘기 해주셨더라.. 음 PI분들한테 도움 될 얘기도 굉장히 많았는데 그건 나한테는 아직 많이는 와닿지 않았던 것 같..다. 다만, 이 토픽 해야겠다, 했을 때 바로 지원해서 쓰라는 말씀 하셨던 건 좀 기억이 나고. (프로포절 얘기였던가.) 연구실 운영지침 일곱가지 중 마지막이 좀 재밌었던 것(실험실에서 신문 보지 말것 ), 다섯번째는 좀 많이 뜨끔했던 것 (무단결석하지 말 것, 반드시 연락!), 구성원에게 완전히 맡기고, 간섭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데카르트를 인용하신 것도 기억이 나고. (이건 정부에다가 이야기해주고 싶었다.. 돈만 주면 된다고, 간섭하지 말라고. 근데 아마 이런 얘기 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뒤집어지겠지.. 그렇지만 예술계쪽 지원 정책에 대해서도, 이런 쪽으로 해달라는 얘기가 제법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리고, 그래피컬 앱스트랙트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고. Science for science, Science in society, Science for society 말씀하신 것도 기억이 나고.  아, 연구할 때 그 관련 논문을 '전부' 읽는 정도는 해야 한다는 말씀도 하셨던 것 같은데 이 부분은 제대로 이해했는지 모르겠다. ... 음 그 얘기를 듣고 잠시 좌절했다. ㅡㅡ; CO on Pt(111)에 대해 논문 찾아놓고 한숨 푹푹 쉬던 생각이 나서. 게다가 다음 토픽은.... 관련 논문들 다 읽는다는 게 가능할지 전혀 알 수 없는, 여기저기 다 걸쳐 있는 것들인데.. 

- 아무튼 조금이라도 적어놓으면 나중에 기억 나지 싶어서, 그 '기억날' 순간을 위해 reinforce 작업. 




- 이런 저런 생각이 계속 오가고, 뭔가 마음 속에 있는 이야기를 털어놓을 사람이 필요했더랬다. 딱 두 사람 혹은 세 사람 정도 모여서, 오늘 생각한 것들이나 이런 저런 얘기를 하고 싶어서. 그래서 나름 어렵게 맥주 한 잔 하자고 메시지를 보냈었는데.. 뭐 타이밍이 좀 애매했던 것 같다. 뭔가 진지하게 얘기를 꺼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하필이면 언니네 파티한 날이어서, 맛있게 먹고는 왔지만 뭔가 좀 속상했다. 언니는 니네끼리 술 한 잔 더 하라고 얘기하기는 했지만, .. 그게 또 쉽지 않아서. 

- 나로서도 난감한 내 성격 중 하나는 사람을 한 번 어려워하기 시작하면 친하게 잘 지내는 사람도 무척 어려워한다는 거다. 그게 무척 이상한게, 마음 먹기에 따라서 어쩜 그렇게 달라지는지. 사람들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잘 떠들고 먼저 사근사근 잘 하다가도, 어느 순간이면 정말 너무 쑥스러워서 어떻게 하지 못하고 얼굴 굳은 채로 구석에 숨어있고. 그렇다고 그 '마음'이 의도대로 먹어지는 것도 아니니, 나야말로 환장하겠다. 정말 socializing이 필요하다, 라고 할 때 굳어버리는 거.

뭐 그것도 그렇지만, 여러 모로 내가 먼저 벽을 만들어 놓고 이렇지 않을까 저렇지 않을까 고민해버리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고. 

- 알고 보면 무척 둔감하고, 다른 사람에게 무관심한 사람인듯. 나란 사람. 



-  붙잡고 있는 생각.. 이라기엔 그냥 계속 반복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주제는, '믿음'에 대한 것인데. 조금은 우스운 말이겠지만, 연구자에게도 자신의 프레임이 옳다, 는 믿음이 필요하다. 물론 그 믿음에 대한 근거가 반드시 필요하고, 그 근거가 충분히 검토되어야 하지만서도. 결국은 자신이 옳다, 라고 믿지 못하면 자신의 논리에 설득력이 없어진다. 미생에서도 나왔지만, 그 말은 그거다. 자신이 설득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설득할 수 없다. 

오늘, 아니 요근래 급작스레 든 생각. 
좀 우스운 얘기이지만, 예전에 면접볼 때의 기억들을 떠올리다가. 무언가 말을 하도록 요구받아 말을 하다 보면, 실은 나도 그렇게 완전히 정리된 형태로 가지고 있던 생각이 아닌데도 뭔가 줄줄줄 나오고, 내 입으로 나오는 말에 내가(..) 오, 그렇네! 라고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꽤 있었더랬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아 이거 아닌데, 라고 생각할만큼 나에게 걸리는 기대 같은 거.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보는 근거는 뭐였을까, 라고 생각해보니. 나는 내가 맞다는 '근거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 뿐이더라. 믿고 있으니, 확신에 찬 말투와, 어느 정도는 너무 터무니없지 않은(..) 근거. 그리고 쓸데없이 강력한 말투. 
솔직히 얘기하자면, 나는 내 자신을 믿는 게 맞다. 난 내가 괜찮은 부분에 대해서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솔직히 다른 사람을 깔보는 경향이 있다. 음 이건 조금 어폐가 있지만. 뭐랄까, 어떤 것이든 기대치가 상당히 높고 그것에 부응하지 못하는 경우 에이, 별거 아닌듯! 이라고 생각해버리는 게 얼굴에 그대로 나타나는 (-_-) 성격이라 .. 깔보는 것처럼 되어 버리는데.. 

문제는 무엇이냐면,. 가면 갈수록. 1. 나는 내 자신을 믿을 수가 없고, 2. 내 기준에 못 미친다, 라고 생각되었던 일들이 얼마나 대단한 것들이었는가를 새삼스레 깨닫게 되는 것. 그리고 그게 얼마나 많은 사람들한테 상처를 주어왔는가, 하는 걸 깨달은 것. 3. 믿음이란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 를 깨달은 것. 


세상 모든 걸 다 아는 사람인양 자신만만했었는데. 갈수록 나는 아는 게 없고, 세상엔 알아야 할 것이 너무 많다. 갈수록 위축되고, 확신이 없어진다. 내가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가, 하는 것을 느끼면 느낄수록, 전까지 가지고 있었던 쓰잘데기 없는 말발이 뭐랄까, 위선같아져서 싫고 짜증이 나고. 내가 얼마나 부족한가, 라는 것에 짜증이 나면서도 뭔가 제대로 그에 대한 조치를 하고 있지 않은 내가 너무 싫고. 이렇게 게으른 내가 싫고.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어떻게 되나, 하는 생각이 들고. 난 왜이렇게 내멋대로의 잣대로 사람들을 재고 평가하고 깔보고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고. 과연 나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끊임없이 올라온다. 

- 왜 이렇게 크질 않니. 왜 그대로 게으르고, 그대로인가. 고민해봤자 해결되지 않는 문제인데, 늘 느끼니 늘 고민한다. 그리고 또 잊어버린다. 그러면 또 비슷한 시간에, 또 기억나서 또 고민하고 괴로워하겠지. 조금씩이라도 나아지려고, 조금이라도 뭔가 해보려고 하는데 늘 제자리인 것만 같다. 





덧글

  • 케이 2012/12/26 01:49 # 답글

    요즘 저랑 비슷한 고민을 하고 계시네요. 이런 성격도 '자존감이 높아서 그래'하며 나름 자뻑(!!)하고 있었는데. 회사 다니면서 이런저런 일이 있었는지라 자괴감이 스물스물 올라와요. 자동차 기어 변속하듯 마음 먹으면, 계기가 있으면 또 예전같이 돌아갈 것 같기도 하고. 착잡한 요즘입니다. 에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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